셋째 날은 말룸파티라고 어떤 계곡으로 향했다. 전 날 호핑투어때는 우리가족 포함 총 15명 가량의 인원이 움직였는데 이 날은 커플 하나만 같이 다녀서 총 6명 밖에 안됐다. 도착하고 잠깐 물놀이를 한 후 가이드분들께서 준비해주신 음식을 먹었다.
여기선 자유시간을 갖기 전에 튜브를 타고 상류지역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음 뒤에 튜브 가이드 한명이 붙어서 노를 저어주며 강을 따라 흘러가는 체험을 즐겼는데, 아무래도 계곡이다보니 물살이 빠르고 낙차가 약하게나마 있는 곳이 있어서 보다 스릴넘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나의 액션이 밋밋해서 그런지 가이드분이 가끔 뒤로 돌아 거꾸로 물결을 타기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가 하나 있다. 현지인 꼬마였는데 사진에선 벗었지만 처음 봤을땐 'KOREA ARMY'라고 쓰인 검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꼭 한국인에게만 어그로를 끌어대곤 했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곤 손으로 물총을 쏘다가 상대가 반응하면 팔로 물보라를 일으키는 식이었고 물총쏘는 법을 친절히 알려주기도 했다. 왜 현지인한테는 안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 문구가 괜히 쓰인 문구가 아니구나 싶었다.
이후 다른 한국인 여성 두명이 튜브를 잡고있을때 그걸 끌고 뭍으로 와주기도 하고, 내가 다이빙을 해서 물속에서 허우적댈때 '누나 누나'거리며 튜브를 던져서 잡게 한 다음 데리고 나오기도 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헤어질때 100페소를 팁으로 주었는데 되게 좋아해서 기뻤던 기억이 난다. 팁 문화가 없는 곳이면 감히 그러지 않았겠지만 필리핀이라 그럴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해변으로 나가 석양을 구경하고자 하였는데 수평선에 구름이 짙게 깔려있어서 아쉽게도 전날처럼 제대로 보진 못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우기에 석양을 본다는건 다소 힘든일인 듯 하다.
얼굴은 나름 선크림을 열심히 발랐지만 다리는 포기한지 오래였기에 상당히 많이 탔다. 3~4일 간은 계속 쓰라리고 가려울 정도였다.
마사지를 할 때는 향기나는 에센스를 발라주었는데 미끌거리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이 날 저녁은 Sensi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는데 여러모로 별로였다. 일단 라이브 가수들이 노래는 뒷전이고 떠들기 바빠서 시끄러웠고, 식사도 되게 늦게 나왔다. 심지어 맥주는 식사가 나올때도 안나와서 몇번 더 요청했는데 그래도 늦게 나왔다. 동생이랑 엄마는 그래도 음식은 맛있었다는데 내가 먹은 생선 감자요리는 안타깝게도 맛 역시 별로였다. 식사를 대충 해치우고 해변으로 나와 산책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스콜이 쏟아졌다. 이 날은 좀 오래 왔는데 1시간 반 정도 온 듯 하다. 8시 정도에 눈을 떴는데 비가 쏟아지길래 곧 그치겠거니 했는데 그럴 기미가 안보여 그냥 나와서 리조트 내를 걸어다녔다. 파란 하늘에 하얀 뭉개구름이 떴는데 한국의 폭우같은 비가 쏟아지다니 요상한 기분이었다.
이 날은 마사지 빼곤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해변가의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사먹고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저건 필리핀 식 요리라는데 특별한 건 없고 다소 짭짜름한 고기구이와 밥, 계란후라이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데 해변의 재질과 색이 바다의 풍경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칼리보 공항에서 본 바다는 한국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여긴 에메랄드 빛인걸 보면 그렇다. 아무래도 하얗고 고운 모래사장이 에메랄드 빛의 주 재료겠지?
이후 벤을 타고 골프장을 끼고있는 한 커다란 숙소에 갔는데 거기서 전신 스파를 받았다. 그 전에 해변의 신기하게 생긴 굴과 해변을 구경했는데 이 곳 모래사장엔 산호가 가득했다.
크리스탈 코브에서도 그랬는데 모래사장에 산호가 널려있는건 무척 진귀한 풍경이었다. 화이트 비치에도 산호가 종종 보이긴 하지만 인파가 많아서 그런지 흐트러져서 일부러 찾지 않는 한 잘 보이지 않는데 저 두 곳은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물결을 따라 긴 곡선 형태로 잔해가 늘어져있었다. 크리스탈 코브에서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아 맘에 드는 조각을 못 가져온게 아쉬웠는데 여기서 예쁜 한 조각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 곳 스파는 전 일정에서 받은 스파보다 훨씬 비싼 곳이었다. 8만원 정도로 기억한다. 들어가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온탕에 몸을 푼 다음 벨을 누르면 마사지사가 와서 전신 마사지를 해준다. 몸 발은 물론 얼굴과 정수리까지 해주는데 그 덕에 목욕 후 두르고 있던 얇은 천 역시 벗은 상태로 있어야 했기에 약간 민망했다. 그래도 당장 마사지를 안하는 부분은 천으로 가려두기도 하고, 눈 위에 종이?를 올려둬서 눈을 뜰 수 없게 만들기에 수치심은 금방 잊고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었다. 이때 받은 부위 중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 그리고 발바닥 안쪽 부위가 엄청 아팠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날의 마지막 저녁은 해변가에서 가족들과 물장구를 치며 보냈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열대기후의 나라인지라 물은 전혀 차갑지 않았다.(가장 차가웠던 물은 말룸파티 계곡의 물이었다. 여기도 막상 들어가면 잊게 되지만)
크고 격하게 수영을 하기보단 부모님의 배영 연습을 도와드리고 바닷물과 모래사장의 감촉을 물씬 즐겼는데 평화롭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과 가방을 가지고 와서 해변에 맘껏 들어가기 힘들었던지라 모래 조형물을 만들기도 했는데 밀물에 서서히 잠겼던 모습이 생각난다. 뒤로 하고 돌아서서 가는데 지나가던 여행객이 플래시를 터트려가며 찍는걸 볼 수 있었다. 저의 작품이 당신의 추억 한 조각이 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마지막 날 저녁은 첫 날 저녁에 들렸던 바에 갔다. 그때는 망고주스와 모히또 같은 음료만 마셨는데 이 날은 제대로 식사를 즐겼다. 음식이 뛰어나게 맛있진 않았지만 맛은 괜찮았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좋았다. 무엇보다 분위기와 라이브 가수의 노래는 다른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이 날은 엄마가 가수한테 리퀘스트도 부탁해서 들을 수 있었는데 스팅의 'English man in New Yorks'이었다. (저녁 먹으러 나서는 길에 리조트 내 뷔페에서 들리던 노래였다) 필리핀에서 뉴욕 노래라니 좀 이상하지만 분위기는 좋았고 역시 잘 부르셨다. 동영상 촬영은 물론 박수갈채와 팁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신기한게 이 날 자리잡고 음식을 시킨 후 노래가 끝났을때 박수를 열심히 쳤는데 우리를 기억하는건지 'Nice to see you again'이러는 것이 아닌가. 우리 가족이 매번 노래가 끝날때마다 박수를 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엄마의 격한 리액션이 기억에 남으셨던 것 같다. 이 곳은 노래에 집중하기 보단 대화하느라 바쁜 사람들이 다수인지 박수 소리랄게 없었는데 그래도 우리가 열심히 치다보니 이어 따라 하시는 분이 몇 생기셔서 기분이 좋았다. 가수 분에게도 이 마음이 전해졌기를.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아빠가 갑자기 철판 아이스크림을 찾으셨다. 이 근방을 여러번 돌아다녔지만 한번도 보지 못했던지라 계속 헤맸는데 동생이 검색으로 찾았는지 도착할 수 있어서 각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주문했다. 가보니 한국인 맛집인지 한국어로 적혀있는 메뉴판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쿠키 앤 크림을 주문할까 했는데 이런 곳에서 먹기엔 다소 심심한 듯 하여 코코넛을 주문했다. 맛이 고소하고 깔끔해서 가볍게 먹기 좋았다.
다음 날 배와 벤을 타고 다시 칼리보 공항으로 이동했다. 도착 후 한 사무실 안에 앉아 시간을 기다렸는데 비가 한창 쏟아졌었는지 바닥에 물이 가득했고 하늘은 맑았다.
12시 정도에 비행기를 타고 이륙을 했다. 출국 날과 비슷하게 날씨가 좋아서 맑은 하늘과 구름을 볼 수 있었다.
여행 내내 보라카이의 분위기에 한껏 취해있던지라 다시금 현실 로그인을 할 생각에 다소 우울했는데 짐을 싸고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벤에 싣고 이동하는 일련의 피곤한 일을 겪어서 그런지 급작스럽지 않게 천천히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먼 미래에 순간이동이 가능해져서 1초만에 한국과 타지를 이동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마음의 준비같은게 힘들어지지 않을까? 물론 거리낌 없이 기술의 이익을 누리겠지만 말이다. <하와이하다>에서 읽은 문구인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은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지만 그로 인해 시간이 10배는 더 빨리 흐르게 되었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문구는 한국과 필리핀을 두고 적용할 수 도 있겠다 싶다.
그러고보면 필리핀은 인구는 많지만 경제력은 다소 부족한 나라라던데, 몇 년 뒤엔 그 인구를 바탕으로 한국을 넘보는 강대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어떠려나?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이 나라가 앞으로 보다 세계의 파도를 잘 해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와서 쓰는거지만 사실 이번 여행에 대해선 큰 기대가 없었다. 첫번째 이유는 필리핀은 이미 한번 와 본 나라였고(그때는 세부였지만) 두번째 이유는 처음 본 바다의 풍경이 동해와 비슷해보였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시간동안 정말 알차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 생애 이렇게 매일매일 물놀이를 해본 적이 있던가 싶었다. 특히 이번엔 수영을 못하시는 부모님 마저 구명조끼와 튜브, 그리고 자식들의 힘을 빌려 즐겁게 즐기시고 마지막엔 혼자서 헤엄치기도 하셔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가이드를 비롯해 만난 여러 현지인들은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고 덕에 밝은 기운을 나눠받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와 순수한 장난과 타인을 생각해주는 따스한 마음들은 아직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억들이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다면 다시 한번 더 들리고 싶은 곳이다. 그 때까지 부모님이 건강하셔서 또 다시 즐겁게 바다를 즐길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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